[게파르토 인민단결 공화국] 게파르토 인민단결 공화국 ( 33 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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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GPRS
게파르토 인민단결(人民团结) 공화국(共和国), 또는 '게파르토'는 대륙 하부에 위치한 민주공화국(파시스트) 국가이다. 건국력 1663년경, '피안토네 레파치오'가 휘하 제 1 보병사단, 제 3 기병여단 을 이끌고 제국의 지원을 받아 정변을 일으켜 세운 국가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게파르트 황족이 완전히 몰살되었다. 신년 직전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치러진 열병식 중에 치뤄진 정변이었기에 '해넘이 정변'이라 부르기도 한다. 1680년까지 전범재판 이후 축출되는 날까지 '십자방패당'을 필두로 일당독재 방식으로 집권했다.
정부가 수립된지 9년만에 '위대한 전쟁 '이 발발하며 국난을 겪었다.
2. 상징
2.1. 국호
게파르토 인민단결 공화국 국가재건회의 최고법령 제 1호에 따라 공식 국호를 게파르토 인민단결 공화국 (Geparto unity of the people republic)이라 호칭한다.
건국력 1661년 피안토네 레파치오가 비밀리에 벌인 회담 '국가 재건 최고 회의록' 제 1호 [재건명령에따른국호및지도색과행정편제에관한안] 에 따라 약칭을 '게파르토 인민공화국 '과 '게파르토 공화국으로 정했다. 영문 약칭 및 통칭으로 'Geparto'를 사용하며, 국가코드로는 'GR', 'GPR', 'GPR'등으로 표기한다.
2.2. 국기
십자방패기 | |||
정보 | |||
지위 | 국가 공식 국기 | ||
제정시기 | 건국력 1664년 1월 2일 | ||
근거법령 | 법률 13245호 | ||
도안자 | 슈탄다르테 하겐다스 |
2.3. 국가
2.4. 상징
기본적으로, 게파르토 공화국의 상징물은 십자방패문을 사용한다.
3. 역사
게파르토 제국이 해넘이 정변 이후 경제 재건의 실패와 전쟁 보상금, 국경 분쟁으로 국세가 기울자 해넘이 정변을 통해 피안토네 레파치오에게 전복된 이후 건국, 극우 세력 '십자방패당'의 '주카레프 불리예트'를 정치적 파트너로 삼아 정권을 직접적으로 운영했다.
새로 건국된 게파르토 인민단결공화국, 줄여서 게파르토 공화국'은 초기 결탁한 키르수스와의 거래로 전쟁 배상금 문제를 반쯤 해결하였고, 제정 시대 시행된 경제정책의 성과 가 나타남에 따라 전국적인 지지를 받았다.
추후 낙후된 게파르토군을 재건하기 위해 제정시기 유산을 토대로 군을 재건하기 시작한 게파르토 정부는 곧이어 전국적 내전 상태에 놓인 코르보날 제국을 침공하기 위한 국제적인 영향력을 위해 외교적 파트너를 물색하던 키르수스 제국에게 협력, 종국에는 1672년 11월 21일 코르보날 국경을 넘어 대전쟁에 가담하게 되었다.
4. 지리
15개의 1000년 가까이 이어져온 게파르토의 행정구역들이 주들로 개편되어 게파르토 전역을 관할한다.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이후 잠시동안 현 에세르 영토가 게파르토 제국의 영토인 적이 있었다. 신체적 특징이 뚜렷한 카노쿠겔 들을 중심으로 슈라프트 주, 다사르 주, 하이츤 주, 폴크스 주 등에 아인종들이 다수 거주중이다.
비르셰 주, 오스트자베르코 주, 나이세 주는 공화국 연맹과의 국경분쟁으로 인해 요새화 되어있다. 코르보날 국겅 인접지역은 마약 유통, 약탈 등의 범죄행위가 빈번하다. 게파르토의 강을 따라가는 남부는 대표적인 곡창지대로서, 밀 농사가 유명하다.
게파르토의 북부와 남부를 가로지르는 강, 일명 '쌍둥이의 강'이라 불리우는 뮈레시 강, 시에산노 강은 일종의 국민적 자존심으로서 기능한다.
5. 행정 구역
게파르토의 행정구역은 15개 주로 크게 나뉘고, 다음은 도, 시, 군, 구로 나뉜다. 이하로는 읍, 면, 리로 다시 한 번 나뉜다. 최하위 가구단위로서 통, 반 제도가 사용된다. 제도는 1667년 행정대조사 계획으로 체계가 잡혔다.
6. 정치
공화제 및 다당제를 추구하도록 헌법에 명시되어 있으나, 피안토네는 '국가위기사태'가 지나가고 나면 언제든 자리에서 물러날 계획이라 전했다. 십자방패당과 정치적 협력을 시도한 피안토네 정권은 1681년 전범재판 시기까지 사실상의 일당독재 정책을 유지했다.
7. 경제
게파르토의 경제 성장 노력 에 나타난 성과들로 완만히 상승중이었으며, 키르수스의 7억 폴리거마르크 차관 도입에 이어 공화국은 일시적인 경제호황을 맞았다. 대외적으로 공화국 연맹과 공산주의자들의 분쟁이라는 변수가 존재한다.
7.1. 과학기술 및 산업
베른하이어와 키르수스에게 전수받은 마도학 산업과 발달한 포병전술, 포 제조학에 힘입어 게파르토의 포 완성률은 헤스페로스벨트의 포 제조술에서는 항상 상위권을 점한다. 대부분의 기술력은 제정 시대 정책인 '평균화 정책'으로 외국에 파견한 여러 유학생들로 인해 대륙 평균 혹은 그 이하의 수준을 지닌다.
게파르토 제정 후기 농업국가에서 경•중공업 중심 산업국가로 전면 탈피를 시도했다. 아직 남부에는 많은 곡창지대가 남아있다.
8. 군사
게파르토 공화국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외교
외교적 협력국이자 경제적인 종속주로서 키르수스 제국이 존재하며, 따라서 베른하이어와도 외교적 관계를 수립했다. 중립국으로서 크레스터프를 대우중이며, 에세르 자치량과의 상호협력관계를 유지중이다.
공화국 연맹은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도중의 관계 악화와 종전- 게파르토 공화국 수립 후에까지 벌어진 국경분쟁으로 인해서 일종의 적국으로 상정중이다. 키르수스의 반-사회•공산주의자 정책으로 인해 대부분의 사회주의 채택 국가와는 좋지 않은 관계를 유지중이다.
10. 사회
제정 시기의 수탈로 인해 빈곤층이 넘쳐났으나, 해넘이 정변 이후 호황으로 인해 급속도로 나아졌다. 유년기에 호황기를 보낸 세대가 노인 세대와의 세대적 갈등을 야기중이며, 좌파 세력은 정치 전쟁 이후 혁명동맹과 함께 몰락했다. 이후 지하 단체로서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우파 대부분은 피안토네의 십자방패당을 지지중이다.
11. 문화
특유의 스튜, '굴라그' 문화와, 술이 상당히 유명하다. 북부 노르트란트 지역의 화이트 와인과 남부 지바라테 주의 포도주가 게파르토의 명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식문화는 헤스페로스벨트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제정 시대 산업화와 함께 문화적인 발달 역시 시도되었는데, 도시로 강제이주한 이주민들이 도시 영화관에서 영화를 시청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영화를 좋아하던 당시 황제로 인해 최소한 키르수스- 그란치프 전쟁 이전부터 영화감독 인재가 발굴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선전영화가 촬영되며 공화국 정부는 해당 영화산업을 유용하게 이용했다.

